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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2025) 리뷰원작 소설과의 비교, 그리고 1818년과 2025년이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읽는 방식

jogoodday 2025. 12. 22. 19:21

아래 리뷰는 “최근에 나온 프랑켄슈타인 영화”로 가장 화제가 컸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Frankenstein〉(2025, Netflix 공개)**를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스포일러는 후반부에 별도로 표시해두겠습니다.

 

1) 이 영화가 선택한 프랑켄슈타인: “공포”보다 “관계”를 전면에

메리 셸리의 원작이 (괴물의 탄생 그 자체보다) **‘창조 행위의 윤리’와 ‘책임의 파국’**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텍스트라면, 델 토로의 영화는 그 윤리를 **‘부자(父子) 관계의 정서’**로 번역해 관객의 심장에 먼저 꽂아 넣습니다. 델 토로가 인터뷰에서 이 이야기를 “아버지와 아들”의 프레임으로 읽고, 기존의 “고통과 후회”에 더해 “용서”를 확장했다고 말한 점은 영화의 방향성을 정확히 요약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프랑켄슈타인=호러 IP’라는 기대를 정면으로 비켜갑니다. 무섭게 놀라게 하는 장면보다, 창조자와 피조물이 서로를 규정하는 방식—더 정확히는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와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가 부딪히는 방식—에 긴 시간을 씁니다. 어떤 평이 “고전이지만 폭발적으로 멜로드라마틱한 재애니메이션”이라고 묘사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2)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 ‘구조’와 ‘온도’

원작 소설은 월턴의 편지 → 빅터의 고백 → 크리처의 자기서사가 겹겹이 쌓이는 액자(에피스톨러리) 구조로, “누가 누구를 어떻게 서술하는가”가 곧 윤리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즉, 원작은 줄거리만큼이나 **‘관점의 편향’**이 핵심입니다. 빅터의 말이 전부인지, 크리처의 말이 전부인지, 독자는 계속 의심하게 되죠.

반면 영화는 매체의 문법상 관점 실험을 축소하는 대신, 감정의 온도를 높여 “이 관계를 당신이 느끼게 하겠다” 쪽으로 갑니다. 특히 델 토로는 크리처를 **‘말하는 존재(eloquent)’**로 복원해, 과거 영화들이 종종 단순화했던 “그로테스크한 괴물” 이미지를 비껴가려 합니다(‘괴물의 비명’ 대신 언어와 비극을 돌려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또한 대중적으로 회자된 비교 글들에 따르면, 델 토로는 서사를 더 “공감/심리” 쪽으로 이동시키며, 엘리자베스의 성격/역할을 더 능동적으로 바꾸고, 몇몇 인물·사건을 새로 배치하는 등 “정통 번안”이라기보다 “동반자적 재해석”을 택합니다.

 

3) 1818년의 프랑켄슈타인: ‘과학’이 신화가 되던 순간의 공포

원작이 1818년에 출간됐다는 사실은 단순한 연도가 아니라, 작품의 공포가 어디서 오는지 설명해줍니다. 당시 유럽은 계몽과 반계몽(낭만주의)의 긴장, 그리고 생명과 물질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과학적 호기심이 한꺼번에 끓었습니다. 원작이 “근대 프로메테우스”를 부제로 택한 것도,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보는 야심(ambition)과 책임의 붕괴를 신화적 스케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죠.

특히 셸리가 글을 쓰던 무렵, “죽은 몸에 전기가 통하면 움직일 수 있다”는 식의 갈바니즘(전기 생리학) 대중 담론이 공기를 지배했습니다. 이런 과학적 상상력은 ‘창조’가 더 이상 신비가 아니라 실험실의 사건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낳았고, 소설은 그 불안 위에서 작동합니다.

원작에서 진짜 공포는 “시체를 이어 붙였다”가 아니라, 만든 다음에 버린 것—창조가 ‘탄생’에서 끝나지 않고 ‘양육/책임’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입니다. Britannica가 요약하듯, 이야기는 결국 창조자를 “괴롭히는” 존재의 탄생으로 귀결되지만, 그 책임의 연쇄가 핵심입니다.

 

4) 2025년의 프랑켄슈타인: 기술 공포가 ‘창조’에서 ‘운영’으로 옮겨온 시대

2025년에 이 이야기가 다시 강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기술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1818년의 공포가 “생명을 만든다”는 창조의 순간에 있었다면, 2025년의 공포는 종종 **“만든 뒤 어떻게 운영/확산/통제되는가”**에 있습니다.

  • 유전자 편집·생명공학은 “가능/불가능”을 넘어 “허용/정당화”의 문제로 가고,
  • 알고리즘·플랫폼·생성형 AI는 “만드는 순간”보다 **배포 이후의 파급(사회적 책임, 편향, 피해)**가 더 큰 윤리 이슈가 됩니다.

이 지점에서 델 토로가 “용서”와 “상처의 대물림”을 강조한 건, 매우 2025년적인 선택입니다. 기술에 대한 공포를 단지 ‘무서운 결과물’로 형상화하는 대신, 관계의 실패(책임의 실패)가 낳는 트라우마의 연쇄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맥락은, 이 영화가 “극장”이 아니라 넷플릭스라는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동시 소비되는 텍스트라는 점입니다. 이 자체가 오늘날 창작물의 유통 방식이 얼마나 ‘대량 확산’에 최적화됐는지를 보여주고, 프랑켄슈타인의 주제(만들고—퍼뜨리고—책임지지 않는 문제)와 묘하게 공명합니다.

 

5) 영화의 강점: 델 토로의 ‘형태(디자인)’가 곧 윤리의 은유가 된다

델 토로 영화의 미덕 중 하나는, 말로 설교하지 않고 미장센/디자인으로 주제를 말한다는 점입니다. 로저 이버트 리뷰가 강조하듯, 제작·의상·프로덕션 디자인의 디테일이 반복적으로 “창조물과 세계의 균열”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킵니다.
이런 강점 덕분에, 이 영화는 원작의 철학적 질문—“인간은 어디까지 신이 되려 하는가, 그리고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는가”—을 2025년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납득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스포일러 주의) 결말과 주제 해석

아래는 결말/핵심 전개를 암시합니다.

델 토로의 버전은 원작의 냉혹한 정조(복수, 파멸)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화해/치유의 가능성을 더 크게 남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People의 해설 기사에서도 원작과 달리 영화가 더 “희망적인 톤”을 택하며 공감과 용서, 트라우마의 고리를 끊는 쪽에 무게를 둔다고 정리합니다.

이 선택은 원작 팬에게는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든다”는 불만이 될 수 있습니다. 원작의 잔혹함은 단지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라, 책임 회피가 결국 세계를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윤리적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2025년 관객에게는 이 변화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파멸의 교훈”을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고, 오히려 질문은 이쪽으로 이동했으니까요:
“그 파멸 이후,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인간이 될 것인가?”


 

총평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2025)은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영화라기보다, 원작의 질문을 2025년의 정서(트라우마, 관계, 용서)로 재번역한 작품입니다.
원작의 차갑고 철학적인 잔혹함을 기대하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델 토로 특유의 시각적 서사와 ‘괴물’에 대한 연민의 윤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지금의 이야기로 만들기에 충분합니다.